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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아직 밭에 씨앗도 넣기 전에 한 해 농사가 이미 정해집니다. 홍성유기농 60여 농가가 지키는 건, 정한 물량만큼만 내고 정한 곳으로만 보내는 약속입니다.
매출 비중을 보면 두레가 높습니다. 그래서 두레를 사랑합니다. ― 조대성 대표이사
충남 홍성 장곡면, 12월이 되면 이 마을의 책상 위엔 눈이 아니라 종이가 쌓입니다. 생산자들이 한 장씩 적어 낸 작부계획서, 내년 봄부터 김장철까지 무엇을 얼마나 심을지 적은 약속입니다. 아직 밭에 씨앗 하나 넣지 않았지만, 홍성유기농의 한 해는 이 종이 위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60여 농가는 매년 12월 15일까지 봄·가을·김장 농사를 모두 담은 작부계획서를 냅니다. 연초 작목반 회의에서 조합의 판매계획과 맞춰 무엇을 얼마나 심을지 배정을 확정합니다.
홍성유기농은 2005년 8월 장곡면에서 시작해, 지금은 장곡면과 홍동면의 60여 농가가 쌈채소·엽채류·대파·두부콩·쌀 등 열 개 작목반으로 나뉘어 함께 농사를 짓습니다. 품목마다 담당 작목반이 있어, 감자면 감자, 양배추면 양배추를 전문으로 키우는 구조입니다.
"이 홍성이라고 하는, 장곡면 홍동면이라고 하는 지역에 안정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생산할 수 있는 생산자가 60여 명이 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다." ― 조대성 대표이사
이 작목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서로 약속을 지키는 문화입니다. 약속한 양 이상은 내지 않고, 약속한 것을 다른 곳에 팔지도 않습니다. 혼자 잘 키운 작물을 더 비싼 곳에 파는 대신, 정한 물량을 지키는 것이 60여 농가를 하나로 묶는 원칙입니다.

거둔 작물도 규격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감자는 급식용과 마트용, 조림용, 알감자로 나뉘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가고, 규격에서 벗어난 것은 조림용이나 장아찌용으로 흘러갑니다. 양배추도 무게 구간을 나누어 값을 매기니, 밭에서 나온 것은 크기와 상관없이 쓰일 자리를 찾습니다.
대표는 가락시장에 근대를 가져갔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일반 농산물 근대는 짙은 녹색인데 이곳 근대는 봄날 같은 연두색이었고, 색이 옅다는 이유로 절반값을 받았습니다. 밤 기온이 25도를 넘는 여름이면 어린 모종은 심자마자 녹아 버려, 8월부터 10월까지는 잎채소를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조대성 대표이사는 2010년, 서른네 살에 아무 연고 없이 홍성으로 왔습니다. 책 몇 권을 읽고 서울 직장을 그만둔 뒤였습니다.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2년을 배우고서야 쌈채소 농사를 시작했고, 그렇게 홍성유기농의 조합원이 되어 10년 뒤 대표를 맡았습니다.
"매출 비중을 보면 두레가 높습니다. 그래서 두레를 사랑합니다." ― 조대성 대표이사

색이 옅다고 값을 깎이던 근대도, 크기가 작다고 밀려나던 감자도 이 마을에서는 저마다의 자리를 찾습니다. 12월에 받아 든 종이 한 장의 약속이, 오늘도 조합원의 식탁으로 이어집니다.
홍성유기농영농조합법인은 정관에 협력적 농업경영과 친환경 농축업을 실천해 지역 자원의 순환농업을 이루고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적어 두었습니다. 두레이야기 취재 당시 조합원은 1000여 명, 그중 귀농인이 절반가량을 차지했습니다. 대중소농은 물론 자연재배농업을 하는 조합원, 실무를 맡는 조합원까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함께합니다.
조합원들은 생산관리위, 로컬푸드위, 지역협력위, 교육문화위, 소식지위 등 여러 위원회로 나뉘어 소통을 이어가고, 작목반끼리는 생산 기술과 정보를 서로 나눕니다. 조합의 살림이 어려웠던 한 해, 사무국은 실무자에게 최선의 보답을 하겠다는 뜻을 정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쪽을 택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이들입니다.
"생산한 사람이 생산물을 나누어주고, 배운 사람이 배움을 나누어주고, 시간과 마음과 솜씨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고자 애쓴다"는 것이 홍성유기농이 스스로 밝히는 원칙입니다. 개인의 문제로 여겨온 것을 함께 짊어질 공공의 문제로 바꾸는 일이, 이들에게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김장철 특파원 보고에는 홍성의 밭이 낱낱이 담겼습니다. 임재덕 생산자의 알타리무는 파종이 일주일 어긋난 것만으로 크기가 달라졌고, 장대진·양수미 생산자 부부의 유기농 통배추는 벌레와 무름병 탓에 만 포기를 심어 삼천 포기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강승식 생산자의 김장 무는 가을장마 침수로 전량을 잃어 보령의 황두선 생산자 무로 대신 채웠습니다. 공장과 달리 농사는 일주일 차이로도 생김새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고서는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전합니다.
어려운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홍성유기농의 김장 대파는 굵기부터 잎끝까지 깔끔하게 자라 품질 걱정 없이 공급되었고, 절임알타리는 원물을 한 번 더 선별해 내보냈습니다. 잘된 것과 아쉬운 것을 가리지 않고 알리는 정직함이, 홍성 김장 채소의 다른 이름입니다.



